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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시 . 종합57

정일근 . 저 모성(母性) 정일근 . 저 모성(母性) 눈 내리는 성탄(聖誕) 아침 우리 집 개가 혼자서 제 새끼들을 낳고 있다 어미가 있어 가르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손이 돕지도 않는데 새끼를 낳고 태를 끊고 젖을 물린다 찬 바람 드는 곳을 제 몸으로 막고 오직 몸의 온기로 만드는 따뜻한 요람에서 제 피를 녹여 새끼를 만들고 제 살을 녹여 젖을 물리는 모성 앞에 나는 한참이나 눈물겨워진다 모성은 신성(神性)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니 하찮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저 모성 앞에 오늘은 성탄절, 동방박사가 찾아와 축복해 주실 것이다 몸 구석구석 핥아주고 배내똥도 핥아주고 핥고 핥아서 제 생명의 등불 밝히는 저 모성 앞에서 정일근 시인 출생 : 1958년 7월 28일 출생지 : 경남 양산 데뷔 : 1984년 실천문학에 시 '야학일기' 학력.. 2023. 2. 8.
기형도 . 봄날은 간다 기형도 .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 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 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 패 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 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 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 2023. 2. 6.
심연수 . 등불 심연수 . 등불 존엄의 거룩한 등불 이 문틈으로 새어나오다가 한줄기 폭풍에 꺼져 버렜습니다 옛날 조상께서 처음 켠 그등불이 그동안 한번도 꺼짐이 없이 이 안을 밝혀왔습니다 그들은 그 빛을 보면서 옛일을 생각 하였고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둠속에서 촛불을 켜는 이 있으니 또다시 밝이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 등잔에는 기름도 많이 있고 심지도 퍽이나 기오니 다시 불만 켜진다면 이 집은 오래 오래 밝아질 것입니다 2023. 2. 4.
박성룡 . 처서기(處暑記) 박성룡 . 처서기(處暑記)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뢰 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 깨어 있다가 저 우뢰 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 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 2023. 2. 2.
윤석구 . 늙어가는 길 윤석구 . 늙어가는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 2023. 1. 25.
오장환 . 영회 오장환 . 영회 후면에 누워 조용히 눈물지어라. 다만 옛을 그리어 궂은비 오는 밤이나 왜가새 나는 밤이나 조그만 돌다리에 서성거리며 오늘 밤도 멀리 그대와 함께 우는 사람이 있다. 경(卿)이여! 어찌 추억 위에 고운 탑을 쌓았는가 애수가 분수같이 흐트러진다. 동구 밖에는 청냉한 달빛에 허물어진 향교 기왓장이 빛나고 댓돌 밑 귀뚜리 운다 다만 올라 그대도 따라 울어라 위태로운 행복은 아름다웠고 이 범 영회(詠懷)의 정은 심히 애절타 모름지기 멸하여 가는 것에 눈물을 기울임은 분명, 멸하여 가는 나를 위로함이라. 분명 나 자신을 위로함이라. 2023. 1. 21.
기형도 . 노을 기형도 . 노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러운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루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 2023. 1. 19.
남궁벽 . 풀 남궁벽 . 풀 풀, 여름 풀 대대목(代代木) 들(野)의 이슬에 젖은 너를 지금 내가 맨발로 사뿐사뿐 밟는다. 애인(愛人)의 입술에 입 맞추는 마음으로 참으로 너는 땅의 입술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이것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죽으면 흙이 되마 그래서 네 뿌리 밑에 가서 너를 북돋아 주마 꾸나 그래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나 내나 우리는 불사(不死)의 둘레를 돌아다니는 중생(衆生)이다. 그 영원(永遠)의 역로(歷路)에서 닥드려 만날 때에 마치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될 때에 지금 내가 너를 사뿐 밟고 있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사뿐 밟아 주려무나. 2023. 1. 17.
마경덕 . 슬픔을 버리다 슬픔을 버리다 마경덕 나는 중독자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네 이름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공인된 마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 앞을 서성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오면 목덜미로 빗물이 흘렀다 전봇대를 껴안고 소리치면 빗소리가 나를 지워버렸다 늘 있었고 어디에도 없는, 너를 만지다가 아득한 슬픔에 털썩, 무릎을 꿇기도 했다 밤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너에게 감염된 그때, 스무 살이었고 한 묶음의 편지를 찢었고 버릴 데 없는 슬픔을 내 몸에 버리기도 하였다 마경덕 詩人 1954년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신발論) 당선으로 등단 2004년 문예진흥금 수혜 2005년 시집 (신발론) 문학의전당 2023. 1. 14.
구상. 꽃자리 구상 .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2023. 1. 13.
김현승 .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2023. 1. 11.
김동명 . 파초(芭蕉) 김동명 . 파초 芭蕉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마리 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려니 너의 드리운 그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편집등록 . 성우혁 2023.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