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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시 . 종합57

안주철 . 은빛 송사리 안주철  .  은빛 송사리 그런 저녁이 있는 거야 저무는 해가 낮은 골짜기에서 보이지 않지만 노을을 떠올리면서 울어야 하는 흐린 저녁이 있는 거야 좁아진 개울에서 찬바람이 한 마리씩 방죽으로 기어올라오고 송사리 떼가 은빛 배를 번갈아 뒤집으면 밤이 되는 거지 옅은 어둠을 한 번씩 튕기는 소리랄까? 귀를 기울이면 노을 지는 소리를 들으려고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걸까? 그만 살자 이 말을 믿지 않지만 그만 살자 우리 이제 잘살자는 말로는 버틸 수 없는 때가 왔는지 모르지만 송사리 떼가 은빛 배를 뒤집으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어 어둠이 길고 긴 한 마리가 되기 전에  김필.청춘 2024. 7. 2.
김동명 . 내 마음은 김동명 . 내 마음은내 마음은 호수요그대 노 저어 오오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내 마음은 촛불이요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내 마음은 나그네요그대 피리를 불어주오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내 마음은 낙엽이요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제목 2024. 5. 23.
신동엽 . 산에 언덕에 신동엽 . 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1930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 단국대학교 사학과 및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되어 등단 ◆ 1967년 장편 서사시 「금강」 발표 ◆ 1969년 4월 7일 (향년 38세) 사망  아들인 서울 의대  신좌섭 교수가  2024년 3월 30일 저녁 6시쯤.. 2024. 4. 29.
변영로 . 봄비 변영로   .  봄비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누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두르는 나의 마음! 제목 2024. 4. 28.
조병화 . 입춘(立春) 조병화 . 입춘(立春) 아직은 얼어 있으리한 나뭇가지 가지에서살결을 찢으며 하늘로솟아오르는 싹들아, 이걸 생명이라고 하던가입춘은그렇게 내게로 다가오며까닭 모르는 그리움이온몸을 쑤신다이걸 어찌하리 어머님저에겐 이젠 봄이 와도봄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봄 냄새나는 눈이 내려도.  .  제목 2024. 2. 15.
박성룡 . 풀잎 박성룡 .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제목 2023. 6. 23.
김상옥 . 봉선화(鳳仙花) 봉선화(鳳仙花) 김상옥 비 오자 장독대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올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 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제목 2023. 6. 18.
김남조 . 허망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열쇠 꾸러미를 너에게 주마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 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 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 산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제목 2023. 5. 25.
김수영 . 폭포 김수영.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제목 2023. 5. 17.
유안진 .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 지란지교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 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 2023. 5. 15.
이승훈 . 풀잎 끝에 이슬 이승훈 -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제목 2023. 5. 10.
노천명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진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 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제목 2023.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