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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번역시

이상 . 李箱

by 조사익시문학(運營者) 2023. 1. 23.

 

 

이상 . 李箱
출생 . 1910년
사망 . 1937년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 화가.

 


이상은 1930년대 국내에서는 선구적인 모더니즘 작가로서 약 6년간 2000여 점의 작품을 집필하며 인간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미적 자율성을 정립하고자 했다

이상의 작품활동은 한국 근대 문학이 국제적·선진적 사조에 합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의의가 있으며, 초현실주의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도 높이 평가받는 반면, 한편으로는 인간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한 극단적인 관념론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생전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고 경제 사정도 불우했다.

초현실주의 실험작인 『오감도』 등을 투고했을 때에는 독자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오직 그의 지인들만이 이상을 천재로 평가했으나 사후 해방과 함께 그의 뛰어난 천재성이 발굴되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육에서는 이미 국정 교과서 시절부터 빠지지 않고 이상의 작품이 실리고 있으며, 이상문학상 역시 그의 이름을 따서 제정되었다.

유년 시절
1910년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김연창(金演昌)[13]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곧바로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 유교적인 가풍 아래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양어머니(백모)는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구박받던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풀었으며, 이상을 입양한 지 얼마 안 되어 친아들이 태어나자 이상을 대놓고 홀대하였다고 한다

백부 또한 어린 조카 김해경을 입양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상은 화가를 지망했지만 백부가 "세태가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를 곯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환쟁이는 안 된다"고 반대해서 결국 백부의 바람대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15]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 기사가 되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 탓에 이상은 현대화된 도시인의 삶을 살았지만, 보수적인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어 당시 신세대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이 탐탁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로서 본인도 이러한 성향을 많이 고민했는지, 말년에 이상이 도쿄에서 김기림에게 쓴 편지에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요.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라고 쓰기도 하였다.

'이상' 이라는 필명은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하던 당시 한 인부가 김해경을 '긴상(김씨)'라고 불러야 할 것을 김 씨와 이 씨를 헷갈려 실수로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보성고보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 구본웅이 선물로 준 오얏나무(李 : 오얏나무 리)로 만들어진 화구상자(箱 : 상자 상)를 받고 친구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 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정하게 되었다는 설도 나와 있다.

전자는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와 아내 변동림의 증언이지만, 후자는 보성고보 시절 직접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고 서명한 것이 발견되어 보다 설득력이 높다.

 

 

문학가 이상
1930년, 조선지에 연재된 장편 소설 12월 12일로 문학계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31년 7월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공복' 등의 일본어 시들이 수록된 <이상(異狀)한 가역반응> 이라는 첫 시집을 냈다.

그 해 8월 일본어로 쓴 시인 '오감도(烏瞰圖)' 와 '삼차각설계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같은 해에 백부가 죽자 이상은 친가로 돌아오게 된다. 친부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가난한 전직 이발사였는데 양반이라는 자존심이 강했던 백부의 집에서 자란 이상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친부가족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이상은 이 당시 자신의 모습을 <슬픈 이야기>라는 수필에서 묘사하고 있다.

1932년 '비구(比久)'라는 가명으로 소설 '지도의 암실',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면서 문학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던 차에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던 이상은 1933년 심한 각혈 증세를 겪고,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는다. 폐결핵을 진단받은 이상은 곧바로 건축 기사일을 그만 두었다.

 

 



금홍이
회사를 그만둔 후 이상은 요양차 갔던 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알게 된다. 요양에서 돌아온 이상은 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금홍을 불러 그녀를 마담 자리에 앉힌 후 금홍과 동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방은 잘 되지 않았고 심심해진 금홍이는 외박을 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그러자 이상은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났냐며 금홍을 몰아세웠고 이에 금홍은 가출을 하거나 이상을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였는데 이상은 이에 크게 놀랐던 듯하다.

결국 금홍은 몇 번의 가출 끝에 이상의 집을 완전히 나가버리고 다방 <제비>는 폐업한다.
그럼에도 금홍을 퍽 사랑했는지 '이런시'에서 금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시 - 이상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 한[23]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보면 알겠지만 다른 지방에서 기생으로 일하는 금홍의 필연적인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굉장히 단편적인 해석이다. 이상의 다른 문학 작품을 살펴보았을 때, 자아 합일에 대한 갈등을 그려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 시풍을 비판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상의 소설 '날개' 역시 금홍과의 동거 생활에서 얻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주인공(이상 자신)은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아내가 매춘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능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중간에 나오는 '연심이'는 금홍의 실제 이름이다. 이외에도 이상은 사망 직전인 1936년, 금홍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한 '봉별기(逢別記)'라는 단편을 쓰기도 했다.

제비가 폐업한 직후 이상은 다방 제비에 드나들던 문학가들의 추천으로 1934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명사들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박태원의 신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河戎)' 이라는 가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구인회에서 그는 특히 같은 병을 앓고 있던 소설가 김유정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심지어는 동반자살을 권유하기도 했다.(김유정의 거절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이상은 금홍과 헤어지고 다방 <제비>가 망한 후에도 1935년에 다시 인사동에 카페 <학>, 종로 1가에 다방 <69>을 차례로 개업했으나 모두 대차게 말아먹게 된다.

경영에 있어서는 천재가 아니었던 듯. 오죽했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냐고 하소연했을 정도. 결국 그 사이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가게 된다.


일본 유학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193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변동림과 결혼한 이상은 서구화된 문물에 익숙해지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1937년 어느 날, 무작정 도쿄로 여행을 떠났으나, 이내 도쿄에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도쿄에 도착한 후 폐결핵이 악화되었고, 새 출발의 발판 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도쿄에 대한 환멸감을 느껴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 이상은 조선에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적힌 편지를 보낸 후 햇빛도 들지 않는 싸구려 방을 얻어서 홀로 은거해 버린다.

리고 그 직후 도쿄에 온 지 몇 달도 안 된 시기인 1937년 2월, 도쿄에서 불령선인(사상불온혐의)으로 체포되어, 도쿄 니시칸다(西神田) 경시청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심한 병(폐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됐고,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4월 17일 새벽 4시에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이상의 부고를 듣고 급히 도쿄로 온 변동림이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다가 6.25 전쟁 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유실되었다.

후기 작품인 <종생기>에서는 자신의 최후를 썼다. 작품 속에는 자신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쓰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1937년 음력 3월 3일을 생년과 대입해 보면 실제 사망 일시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세의 귀재 李箱은 그 通生의 대작(終生記) 한 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1937년 丁丑 3月 3日 未時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卒하다. 향년 만 25세와 11개월. 오호라!

상심 크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 하나의 李箱 구천을 우러러 호곡하고 이 寒山 一片石을 세우노라. 애인 정희는 그대의 몰후 수삼인의 비첩된 바 있고 오히려 장수하니 지하의 李箱아! 바라건댄 명목하라.


다만 공인된 생년인 1910년 8월 10일과 1937년 3월 3일을 계산하면 25세 11개월이 아니라 26세 6개월이 나오는데, 작품에서 완벽하기로 소문난 이상이 자신의 생몰을 틀린 것은 실제 생년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 이상의 판단 착오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의 유언은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일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 "멜론이 먹고 싶다" 였다고 술회하였다. 다음은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회고한 아내 변동림의 글이다.

나는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닿았다. 동대 병원 입원실로 직행하다. 이상의 입원실, 다다미가 깔린 방들, 그중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상이 거기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크게 뜨다. 반가운 표정이 움직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옆에 앉아 손을 잡다 . 안심하는 듯 눈을 다시 감는다. 나는 긴장해서 슬프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나, 죽어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상은 눈을 떠보다 다시 감는다. 떴다 감았다.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의 메론." 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메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97쪽 중)

 

자료출처 . 나무위키

등록 . 성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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